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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Wrote Huangdi Neijing?: The Authors’ Status, Class and Political Ideology
『황제내경』의 저자는 누구인가?: 그들의 신분⋅계급 그리고 정치적 이념
Korean J Acupunct 2017;34:71-81
Published online June 27, 2017;  https://doi.org/10.14406/acu.2017.007
© 2017 Society for Meridian and Acupoint.


Department of Meridian and Acupoint, College of Korean Medicine, Woosuk University
우석대학교 한의과대학 경혈학교실
Correspondence to: Sang-Ryong Lee Department of Meridian and Acupoint, College of Korean Medicine, Woosuk University, Junghwasan-dong, Wansan-gu, Jeonju 54986, Korea Tel: +82-63-290-9029, Fax: +82-63-290-1557, E-mail: lisr@daum.net
Received March 27, 2017; Revised May 15, 2017; Accepted May 17, 2017.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Abstract

Objective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 authors of Huangdi Neijing such as status, class, and political ideology.

Methods:

We analyze the Neijing text and the social order and historical situations in the Han dynasty.

Results:

Some authors of the Neijing were the local medical officers whose salary was 100∼400shi. Their positions were medical craftsmen(yigong) or chief medical craftsmen(yigongchang). They would have published the Neijing after the administrative reforms(146-145 BCE) that began after the suppression of the Rebellion of the Seven Kingdoms. The bureaucrat yigong(chang) would have expected to participate in the public health policy of the empire or kingdom as an acupuncture expert. They would have also expected to contribute to the welfare and health of the privileged intellectual group and the public, hoping to ascend in status and class.

Conclusions:

By investigating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 authors who composed the Neijing, its various aspects would be newly understood.

Keywords: huangdi neijing, medical craftsmen (yigong), ancient chinese literature
서론

漢代에 쓰인 『黃帝內經(이하 『내경』)』 『靈樞』와 『素問』은(1) 고대 중국의 많은 문헌들처럼 저자(들)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익명 뒤에 숨어 있다.

저자(들)의 이러한 익명성 때문에 『내경』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이 학설사와 개념사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이를 통해 『내경』이 전제하고 있는 사상적 배경, 『내경』의 인체관 및 경락학설을 비롯한 주요 개념들, 그리고 임상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해 많은 해명들이 이루어졌다. 다만 이러한 접근들은 의학적 내용에 집중한 나머지 의학이 당대 의료주체들의 사회적 행위의 산물임을 간과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내경』의 학술적 내용을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익명의 저자들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한대의 사회적 질서⋅역사적 상황과 『내경』 본문의 분석을 통해 『내경』 저작자 집단의 신분⋅계급⋅정치적 이념 등 사회적 성격을 해명하였다.

본론

1. 『內經』 著者의 候補들

『내경』의 저자는 본문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혹은 所屬을 드러내고 暗示하는 用語들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용어들을 실마리로 삼아 『내경』 저자의 정체성을 추측할 수 있다. 李建民은 이 주제에 대해서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준다. 그는 고대 중국에서 생명에 관한 지식은 당시 “方技”라는 개념에 총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방기는 다시 네 部門과 세 系統으로 구분된다. 『漢書⋅藝文志⋅方技略』은 방기를 醫經, 經方, 房中, 神仙의 네 부문으로 분류한다. 이건민에 따르면 이 네 부문의 공통점은 醫藥知識이다. 그는 의약지식을 담당하는 직업에는 巫, 醫, 技擊家의 세 계통이 있었다고 말한다1). 우선, 기격가는 오늘날의 武術家에 해당한다. 『내경』에는 武術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기격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 『소문』과 『영추』를 통틀어 “巫”라는 글자가 1회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素問⋅移精變氣論』에서 巫와 관련된 祝由를 다루고, 『素問⋅五藏別論』과 『素問⋅保命全形論』에는 鬼神에 대한 언급이 각각 1회씩 등장한다. 『내경』의 저자들은 무와 축유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고대의 巫者는 질병이 올 것을 알고 병이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먼저 아는 사람이므로 축유를 하면 되었다2).”(2) 「이정변기론」에서도 축유는 가벼운 질병의 초기단계에 사용할 수 있는 고대의 치료법으로 소개되고 있다3).(3) 『내경』의 이러한 호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무와 축유에 대한 대체적인 뉘앙스는 時代的 適實性이 부족한 지나간 시대의 치료법으로서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를 넘지 않는다. 게다가 『내경』의 저자들은 질병을 미리 예측하는 무의 超能力을 “先師”가 전해준 “色脈3)”(4)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내경』의 저자들은 자신들을 巫 보다 진보한 獨立的 傳統의 繼承者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내경』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超自然的인 對象에 귀속시키는 경향을 배척한다. 精靈이나 靈魂⋅超自然的 힘은 呪術的 統制의 대상이다. 따라서 『내경』의 저자들이 呪術師 즉 方士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 黃帝의 질문: 제가 방사들로부터 듣기에 어떤 사람은 腦髓를 臟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腸胃를 臟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腑라고 합니다. 相反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모두 자신이 옳다고 합니다. 이 이유를 모르겠으니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3).(5)

방사들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의 의학적 지식은 부정확하기까지 하다. 위 인용문에 이어지는 岐伯의 대답은 臟⋅腑⋅奇恒之腑 개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다. 비록 후대에 첨가된 篇이기는 하지만 『素問⋅至眞要大論』에서도 황제의 입을 빌어 방사를 조롱하고 있다.

(2-1) 황제: … 『經』의 “盛한 것은 寫하고 虛한 것은 補한다.”는 말을 제가 방사에게 해주었는데 방사들은 이것을 使用하면서도 여전히 충분히 活用하지 못 합니다3).(6)

(2-2) 황제: “寒은 熱로 치료하고 熱은 寒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있는데 방사들은 規則을 버리고 방법을 바꿀 줄 모릅니다. 열병에 한으로 치료하였는데 [여전히] 열이 있거나, 한병에 열로 치료하였는데 [여전히] 한이 있거나, 두 가지가 모두 있는데 새로운 병이 다시 시작하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3)?(7)

인용문 (1)이 방사들의 부정확한 지식을 지적하고 있다면 (2-1)은 방사들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고 불완전하게 밖에 응용하지 못하는 應用能力의 부족함을, (2-2)는 규칙에 고착되어 현실적인 융통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결국 방사집단은 『내경』의 저자들의 눈에 조롱거리이거나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이점은 『漢書⋅藝文志』의 저자와 이건민의 생각과 다르게 『내경』의 저자들이 방기의 修行者들과 社會的 距離(social distance)를 두고 있고 競爭關係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내경』의 저작자들이 巫 및 方士 집단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醫”字를 검토에 보자. “醫”는 醫療人과 醫療行爲를 代表하는 單語임에도 불구하고 『내경』에 조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추』에는 나오지 않고 『소문』에만 총 11회 나타나며 이 중에서 의료인을 의미하는 경우는 7회이다3).(8) 이 중에서도 3회가 「疏五過論」에 등장하는데 「소오과론」에는 또 “醫工”이란 단어가 1회 등장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용어는 “工”이다. 『내경』에서 “工”은 무려 70회나 기재되어 있다2,3).(9) 『소문』의 11편, 『영추』의 17편에 등장하니 『내경』 전반에 걸쳐 골고루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내경』의 저자는 의료행위자를 지칭하기 위해 “醫”를 가급적 회피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 대신에 “工”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경』에서 “工”은 의학지식과 치료원칙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차별되는 지식수준을 가진 사람으로 기술된다.

(3-1) 과거를 본받는 사람은 먼저 『鍼經』을 알아야 하고, 미래와 현재에서 증명하는 사람은 먼저 해의 寒溫, 달의 盛衰를 알고 氣의 浮沈을 살펴서 몸에 調治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바로 증명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2) “어둠을 본다”는 것은 形氣⋅榮衛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오직 工만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해의 寒溫, 달의 盛衰, 四時의 氣의 浮沈을 相互綜合하여 調治하기 때문입니다. 工은 항상 먼저 보지만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어둠을 본다”고 말합니다.

(3-3) 無窮에 통한 사람은 後世에 전하여도 좋습니다. 이것이 工이 차별되는 이유입니다.

(3-4) 하지만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아도 모습이 없고 맛보아도 맛이 없으므로 어둠을 본다고 말하고 이것은 神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합니다.

(3-5) 虛邪란 八方의 虛한 邪氣입니다. 正邪란 몸이 힘을 써서 땀을 흘리고 腠理가 열렸을 때 虛風을 만난 것입니다. 이 때 사람에게 的中한 것이 微微하면 상황도 알 수 없고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上工은 그것의 萌芽를 치료할 수 있는데 반드시 먼저 三部九候의 氣를 보고서 모두 치료하므로 上工이라 합니다. 下工은 이미 모습을 갖춘 것을 치료하고 이미 손상된 것을 치료합니다(굵은 글씨체 강조는 계속하여 번역자)3).(10)

인용문 (3-2)와 (3-4)에서 工은 “感覺할 수 없는 現象을 認識하는 能力”을 가진 사람으로 기술되고 있다. 공은 보이지 않는 현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숨어있는 질병을 치료한다(3-5). 공은 의학적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연현상의 변화에 통달해 있고 이것을 인체의 변화와 상호참조하여 치료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3-1, 3-2). 이러한 능력은 다른 종류의 의료행위자는 갖고 있지 않은 오직 공만이 소유한 差別化된 能力이다. 감각할 수 없는 것을 감각하는 능력은 極限의 水準에 도달한 사람만이 가진 능력이므로 이들의 지식은 持續的으로 傳承될만한 價値를 지닌 唯一한 形態의 知識이다(3-3). 공이란 동일한 집단 안에서도 수준의 차이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질병을 치료하는 높은 수준의 의료행위자가 있는가 하면 可視的인 질병만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을 가진 사람도 있다(3-5). 이 모든 묘사는 공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엘리트 의료행위자임을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공은 단순한 治療技術者를 넘어서서 聖人과 賢人처럼 自然의 秩序와 神秘에 통달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내경』의 저작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선택한 용어가 바로 이 “工”인 것이다. 즉 이들은 감각할 수 없는 현상을 인식하고 숨어있는 질병을 치료하며 자연현상의 변화에 통달한 엘리트 의료행위자인 “工”과 그렇지 않는 일반 非엘리트 의료인 — 당시 통상적으로 “醫”라고 불리던 사람들 — 을 對比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高級 지식과 기술을 가진 醫療專門家라고 생각하였고 이들의 관점에서 低級한 大衆 의료인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가졌던 것이다. 『내경』의 저자들은 전통적으로 낮은 신분으로 여겨져 온 手工業 勞動者인 공에 새롭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동시에 자신이 소유한 지식과 기술에 대해 대단히 높은 자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2. 一般 醫療人의 職業身分

『내경』의 主導的 話者가 자신을 주로 “공”으로 지칭한다는 것은 다음을 시사한다. 우선, 이들이 의료행위에 관여하는 다른 집단 즉 주술의 방사와 종교의 무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는 점과 관련해서 보자면 “공”은 의료행위를 일차적으로 日常生活의 必要를 위해 수행하는 신체적 노동이나 기술의 일종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의 士農工商 四民의 職業身分體制 안에서 자신들과 가장 비교적 가까운 집단을 고른다면 그것을 공으로 파악하였음을 보여준다.

의료인을 “공”이라고 지칭한 최초의 기록은 『史記』 「扁鵲列傳」이다4).(11) 고대사회에서 공은 낮은 신분의 직업이었다. 商代의 胛骨文에서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奴隸를 “공”으로 기록하였고5), 西周 時期의 문헌들에서는 수공업 생산자(혹은 그들의 관리자)를 “百工”혹은 “工”으로 기록하였다. 이들은 생산 활동이 王室이나 貴族에 종속된 依存的 手工業者들이었고 주로 귀족을 위한 생활용품이나 사치품 등을 생산하였다. 이 당시 수공업자의 신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官營과 私營을 막론하고 農業 勞動에 종사하는 이른바 庶人 보다 낮았다는 것은 확실하다(관리자의 일부는 하급 귀족)6). 한대의 관영 수공업 생산자에는 국가의 의무노동에 동원된 사람(卒), 범죄인에게 부과된 강제노동의 수행자(徒), 노예, 그리고 고용된 平民 技術者(工)가 있었다. 이들 중 졸과 도, 노예는 사회적으로 비천한 취급을 받았다7). 공은 서인과 같이 納稅와 徭役의 의무를 지녔고 관영 수공업기관으로부터 낮은 임금을 지불받았다8). 사영 수공업자 중 일부는 높은 임금을 받는 경우가 있었지만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농민 보다 낮았다9).

직업에서 醫의 신분도 공과 유사하였다. 後漢 直後의 如淳(221∼265 CE)에 따르면 良家子는 “醫⋅巫⋅商賈⋅百工이 아니다4).”(12) 이후, 양가자에 대한 해석을 두고 여러 학자들의 논란이 있었다. 七科謫(7종의 범죄자)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양가자라는 설, 관리 및 농민이 양가자라는 설, 良家는 3세대 동안 巫, 醫, 七科謫을 배출하지 않은 농업생산가 가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10). 어느 경우이던지 양가는 평민가정을 의미하므로 의는 평민과 동등한 사회적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범죄인과 더불어 논해진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아주 낮은 평가를 받았음을 시사한다. 한 신분은 특정한 종류의 生活運營方式의 소유로 특징지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 부정적으로 특정한 생활운영방식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점으로도 판단되어진다. 대표적으로, 身分的 特權을 가진 사람들은 일상적인 신체노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영리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신분적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는 경우가 그렇다(936)11). 위에서 말했듯이 의은 신체적 노동을 하는 기술자들이고 이들은 孟子의 구분에 따르면 支配를 받는 “勞力者”에 속한다12).(13) 또한 당시 의는 전통적으로 營利追求적인 사람들로 생각되어졌다. 예컨대 韓非子는 “의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잘 빨고 다른 사람의 피를 잘 머금는 것은 뼈와 살이 섞인 親族이어서가 아니라 利益이 늘어나기 때문이다13).”(14)라고 하였고, 司馬遷은 “의⋅방사 등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정신과 능력을 다하는 것은 糧食(財物)을 중시하기 때문4)”(15)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의는 부정적으로 특권화 된 신분집단(negatively privileged status group)이었다14).(16) 치료와 그것과 관련된 생활운영방식이 오랜 기간 동안 특정한 家族이나 氏族 간에 世襲되어 되는 과정 중에 의라는 직업이 신분화 되었다. 이 직업신분은 낮은 社會的 名譽를 갖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것이었으므로 의료행위 자체도 낮은 사회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낮은 신분상태가 사회적으로 반드시 불리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분상태는 특정한 영리기회를 독점하게도 만들고 기피하게도 만든다(306)11). 의료행위가 명예롭지 않고 卑賤한 영리활동으로 인식되는 한 醫 보다 상위 신분의 사람들이 醫療市長에 진출할 가능성은 감소한다. 따라서 醫의 낮은 신분이 오히려 그들의 영리기회를 보장하는 이점으로 작용한다.

3. 漢代의 身分秩序와 醫療官職

그런데 『내경』에는 勞動者의 不平(929)11), 賤民身分의 怨恨(934-5)11) 같은 부정적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 사실은 수공업자들(工人)이 쓴 것으로 알려진 『墨子』와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묵자』에는 貴賤의 對比가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귀족이 천민을 무시하는 것은 天下의 害이다15).”,(17) “귀족이 천민을 무시하는 것은 하늘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15).”(18) 이처럼 『묵자』에는 귀족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나 태도가 표출되어 있다. 그런데 내경에는 그러한 감정표출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경』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술에 대한 自負心으로 충만해있다. 그렇다면 醫의 낮은 신분과 『내경』에 보이는 高尙한 品位感情(sense of dignity) 사이의 克明한 對照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내경』저자들의 신분이 일반적인 의료행위자들과 달랐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漢은 기본적으로 신분질서가 法律的으로 制度化된 身分社會였다. 皇帝나 그에게서 권리를 위임받은 官僚가 개인에게 差等的인 명예를 수여하였다. 이 명예의 수여는 爵의 수여라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것에 따른 특권과 의무의 차등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135)16). 秦을 계승한 한의 爵位制가 改革的이었던 측면은 周代에서처럼 출생신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성과에 따라 주어질 수도 있고 적용대상이 평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30)17). 이는 평민도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평민의 작위(民爵)는 최고위 20등급 중에서 8등급 公乘까지, 관료가 받는 官爵은 최고위 徹侯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한의 신분질서는 황제를 최정점으로 그 아래에 有爵階層/無爵階層/罪囚⋅奴隸로 階層化 되어있다18). 이 구조 안에서 한 개인이나 집단의 신분은 출생신분⋅관직신분⋅직업신분 뿐만 아니라 階級狀態⋅政治的 黨派(political party) 등과 서로 관계되어서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漢 사회에서 귀족이 아닌 평민이 신분질서의 上層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관리가 되는 것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19) 말단관리라도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 상급관직자의 추천을 받는 기회가 있으면 고위관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예컨대 빈곤한 가정 출신으로 縣의 獄吏였던 公孫弘은 나중에 朝廷의 丞相 職位까지 올라갔고, 가난한 평민으로 오랫동안 무직상태로 유랑하던 主父偃은 齊國의 승상에 올랐으며(『史記⋅平津侯主父列傳』)4), 100石級 이하 말단관리 佐史로 시작한 趙禹는 2000석급 少府卿에 임명되었다(『史記⋅酷吏列傳』)4). 신체적 노동과 영리활동을 기피하는 귀족이 더군다나 당시 낮은 신분의 직업행위로 여겨지던 의료행위에 종사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따라서 최소한 『내경』의 저자 일부가 귀족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경』의 저자는 신분이 낮은 일반적인 의료인들과 차별되는 관직소유자나 그것에 상응하는 능력을 가진 관료희망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을 「소오과론」의 용어를 따라서 잠정적으로 醫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면 의공이라는 어떤 집단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는지 『내경』외의 文獻記錄과 物質的 證據가 있는가? 『漢書⋅武五子傳』에 燕刺王 旦이 玉璽를 醫工長에게 맡겼다는 기록이 있다(元鳳元年 80 BCE)19).(20) 『東觀漢記⋅第五倫傳』에는 제오륜이란 사람이 淮陽王의 醫工長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20),(21) 『後漢書⋅第五钟离宋寒列传』에도 제오륜이 淮陽國의 의공장에 補闕되었다는 사건이 기재되어 있다(光武帝 建武27年 51 CE)21).(22) 1968년, 河北省 滿城陵山에서 서한시기 中山國의 王이었던 劉勝(재위 154∼113 BCE) 및 王后 竇綰의 묘가 발굴되었다. 이곳의 副葬品 중에는 “醫工”이란 글자가 새겨진 銅盆이 포함되어 있었다(58- 89).22) 의공과 의공장의 정체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대의 의료제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4. 漢代의 醫療制度

한대의 의료제도는 前漢과 後漢 모두 기본적으로 少府에서 관할하였다23).(23) 소부 傘下에 의료를 담당하는 最高位職인 太醫令과 그를 보조하는 太醫丞이 설치되었다. 소부는 皇室의 運營과 管理를 위한 私的 機構이므로 여기에 소속된 의료관직도 기본적으로 황제와 그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地方政府인 王國의 의료제도도 중앙을 모방하여 소부 산하에 太醫令⋅丞을 두었다. 이들은 諸侯 및 王室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왕국의 태의는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전한 중기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해지고 왕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태의의 명칭도 “醫工長”으로 변경되었다. 후한에 와서는 중앙의 의료직이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태의령 산하에 藥丞과 方丞이 각 1명씩 설치되고 그 밑에 員醫 293명과 員吏 19명이 부속되었다. 소부 계통 외에도 九卿의 각 曹 산하에 모두 15명의 官醫가 설치되고 황후를 보조하는 中宮 계통 의료직들도 신설되었다. 지방 의료직에서도 醫曹가 신설되었다24-26).

의공장이란 관직에 대해서는 후한의 관료제도를 총괄한 『後漢書⋅百官志』의 기재 외에도 “郎邪醫長”, “新城醫長”, “彭城醫長”, “窆城醫長”이라고 새겨진 官印들이 후한 제후국들에서 발굴되었다27). 많은 학자들이 “醫長”이 의공장의 줄임말이라고 주장하는데 발굴된 장소와 관인의 명칭으로 볼 때 의장은 지방 郡縣에 설치된 의료관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공장의 산하에 어떤 관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문헌기록이 없다. 의공장의 명칭이 문자적으로 의공의 長을 의미한다는 점과, 위에서 서술한 만성한묘에서 발굴된 동분의 예에서 볼 때 의공들을 통솔하는 최고관리자를 의공장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24,28,29).(24)

5. 醫療職 官僚의 經濟的 階級

한대 관직의 계층은 賃金(俸祿)에 따른 序列(祿秩)과 결합 되어 있었다. 600石 이상을 받는 고급 관료(官)는 五大夫부터 徹侯까지의 관작을 가지며, 500석 이하의 하급 관료(吏)는 다시 200석을 기준으로 官長級 내지 副官級과 그 이하 말단관료로 구분된다. 오대부 이상은 부역을 면제 받는 특권을 가진다30). 그렇다면 의료관직은 이중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을까? 『후한서⋅백관지』에 따르면 중앙직 태의령은 600석급이고, 태의승(藥丞, 方丞)의 녹질은 기록에 없으나 다른 관서의 예에서 볼 때 200석급으로 추정된다. 太醫監의 녹질도 기록에 없으나 600석급으로 추정된다. 尙藥監은 600석급, 中宮藥長은 400석급이다. 지방직 의공장은 『후한서⋅백관지』에 따르면 400석급이다. 의공은 관직 자체가 문헌기록에 있지 않지만 의공장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높으면 200석급, 대략 100석급 혹은 심지어 그 이하일 수도 있다. 중앙직 員醫, 員吏 및 각 曹에 배치된 官醫들은 최하급 말단관료들로서 12∼18석 밖에 받지 못 하였다. 정식관직이 아닌 임시관직으로 醫待詔와 本草待詔가 있었고 100석급으로 추정된다31). 이 외에 관서에 근무하면서 말단관료들을 보조하는 民間人인 給醫들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빈곤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30). 이처럼 의료직 관료들도 단일한 신분⋅계급이 아니고 여러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료직 관료들은 어느 계층부터 경제적으로 충분히 생활하였을까? 한대 관료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127)32) 시기에 따라서 물가의 변동이 있었으므로 일률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보수적인 기준으로 말한다면 100석급 관리의 생활은 100苗의 農地를 경작하는 농부의 경우와 비슷하고 최소한 200석급 관리라야 일가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218)17). 중앙직 의료직에서 200석급 이상은 10명 내외이다. 그 중에서도 상약감 등 中宮 소속은 宦官들이 맡고, 參醫藥師, 太醫監처럼 外戚이나 고위관료가 兼職하는 것들도 있다. 그렇다면 『내경』작자가 만약 중앙직 의료직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맡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태의령과 태의승 3석 정도 밖에 없다. 따라서 가능성이 매우 제한된다.

6. 「疏五過論」과 前漢의 政治的 狀況

본문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내경』은 지방에서 쓰여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음을 보자.

(4-1) 황제가 明堂에 앉아서 雷公을 불러 물음: “그대는 醫의 道를 아는가?” 뇌공의 대답: “외우기도 하고 꽤 이해는 하는데 이해는 하지만 구별을 못 하고 구별을 하더라도 분명하지가 않고 분명해도 뚜렷하지가 않아서 여러 관료들을 치료하기에는 충분하지만 侯王에 대해서는 부족합니다3).(25)

(4-2) 診療에는 세 가지 항상 해야할 것이 있다. 반드시 貴賤을 묻고, 封君인데 실패했는지 묻고, 侯王으로 (復位) 되고 싶어하는지 물어라3).(26)

위 내용으로 볼 때 『내경』작자가 치료하는 중요한 환자들 중에 관료, 봉군, 후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봉군은 春秋 末期에 등장해서 戰國時代에 널리 보급된 제도로 國王에 의해 縣이나 邑에 封해진 君을 의미하였고33), 한대에는 王⋅侯⋅君⋅公主 네 종류의 봉군이 존재하였다34). 후왕은 『老子』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로 諸侯를 지칭한다(141-2)35). 諸侯王은 황제에게 가까운 친족 및 功臣 중에서도 특히 功績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제후왕의 영토는 매우 커서 수군 수십 현의 규모이다. 제후왕은 왕국 내 통치권을 장악하고 중앙정부와 거의 같은 독립적인 관료기구를 설치하였다(104-5)36). 이 단어들이 『내경』텍스트에서 그저 단순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진료상황의 맥락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다. 첫 번째, 뇌공은 자신의 실력이 관료계층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후왕 같은 최고위 신분을 치료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항이 구별, 분명, 뚜렷 등 인식의 기준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내경』의 저자들이, 이것저것 세부적인 사항을 질문한다는 측면에서 제후들을 관료 보다 더 까다로운 고객으로 생각하였다는 실제 평가를 보여준다.

「소오과론」에 나오는 두 번째 예문은 진단시에 소홀하기 쉬운 다섯 가지 잘못의 일부이다. 「소오과론」의 전체 내용은 진단시에 환자의 신분 및 계급에 변화가 있었는지 반드시 확인하라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신분의 큰 수준의 하향이동으로 인한 “脫營”, 계급의 큰 수준의 하향이동으로 인한 “失精”, 생활수준의 하락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서적 변화를 진맥과 진단시에 참조하지 않을 때 실수가 발생한다. 다섯 가지 실수는 “人間事를 잘 알지 못한 것(人事不明)”이기 때문에 聖人의 치료는 “인간사에 따라 원칙을 밝힌다(從容人事, 以明經道).”

「소오과론」은 前漢 중기의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漢 高帝는 제국의 서쪽 반은 郡縣制로 직접 통치(家産制 領域)하고 동쪽 반은 君國制로 여러 개의 왕국들을 친족들이 나누어 통치(封建制 領域)하게 하였다. 그러나 文帝 이후 중앙정부는 강제적으로 왕국들의 영토를 분할하고 축소시키고 반란죄를 뒤집어 씌워서 왕국을 폐지하가 위한 절차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정책은 제후들의 광범위한 원한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정권의 저항은 景帝 시기 吳楚七國의 大規模 叛亂(154 BCE)이 진압됨으로서 일단락된다. 난을 진압한 후 경제는 중앙정부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지방관직을 폐지하거나 관직명을 개명하고 인원을 대규모로 감축하였으며 1000석⋅600석급 이상 관리의 任免權도 중앙으로 회수해갔다37). 이후 武帝의 推恩令을 통해서 한 제국의 중앙집권화가 거의 완성된다. 추은령이란 장자가 아닌 제후의 아들이나 형제에게도 왕의 칭호와 영토를 물려받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왕국을 여러 개의 소규모 왕국들로 분할시키는 정책이다. 이 시기 諸侯·列侯 및 그 친족들은 강제로 타지역으로 이주하거나38), 여러 가지 죄목으로 閉封 되고 降等 당하였다39).

「소오과론」은 『내경』의 저자들이 이러한 政治的 激變過程에서 몰락한 지방 제후⋅귀족들을 진료하였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왕국의 태의령이 의공장이란 명칭으로 바뀐 것도 이 시기임이 분명하다. “의공”이라 새겨진 동분과 의료용 침이 출토된 만성한묘의 주인 유승(113∼104 BCE 매장)도 이 시기 인물이다. 반란을 계획한 연왕 단이 자살하기 전 국새를 준 의공장도 이 시기에 살았다. 이상의 사실들과 「소오과론」에 “의공”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모두 최소한 최소한 『내경』일부가 오초칠국의 난 이후 景帝 中五年(146-145 BCE)에 시작된 중앙정부 주도의 관제개혁40) 이후 의공(장)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7. 醫工(長)의 政治的 理念

『내경』은 統治를 중심으로 身體와 自然秩序를 연결시키는 『黃帝四經』⋅『管子』⋅『淮南子』에서 더 나아가 官僚制(bureaucracy)로 人體의 生理를 설명한다. 『소문』 「靈蘭秘典論」⋅「刺法論」⋅「本病論」에는 구체적인 관직명들이 등장하고 각 관직과 臟器가 一對一로 대응한다. 각 장기들은 관료제로 조직되어 있고 君主인 心이 나머지 장기들의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權力이 分散된 政治體制인 封建制(feudalism)나 통치자가 貴族, 名望家와 연합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身分國家(Ständestaat)(CV)41)에서는 나오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내경』의 이 길지 않은 문장들 속에는 (1)1인의 家産制 통치자가 높은 수준의 권력을 행사하고 (2)동시에 통치기구로서 관료제가 발달해야 한다는 家産官僚制(patrimonial bureaucracy)의 조건들이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가산제는 통치자 한 사람이 지배기관인 관료제를 이용하여 大衆을 지배하는 체제이다11).(27) 따라서 우리는 『내경』의 저자가 가산관료제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거나 그것에 익숙한 관료라고 추정할 수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내경』의 저자들이 가산제 정치체제의 正當性(legitimacy)을 수용했다는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공(장)들이 올바른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해 마치 사상가나 정치가처럼 실제로 숙고하였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문제-무제 시기 봉건제가 해체되고 가산제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생존 혹은 성공을 위해 봉건제 보다는 가산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37).(28)

가산제 통치자는 특권 신분집단을 견제하기 위해서 대중의 支持를 동원한다. 따라서 봉건제와 달리 가산제 지배는 광범위한 被統治者의 善意에 의존한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통치자는 대중들의 福祉에 힘쓰는 “百姓들의 아버지”이자 “자비로운 군주”로 비추어지기를 원한다11). “福祉國家(welfare state)”의 이념은 가산제 통치자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가산제 국가가 추구하는 (또는 선전하는) 목표이기도 하다42).(29) 『내경』 안에서도 황제는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비로운 가산제적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5-1) 황제: 제가 先師께 듣기로는 마음에 담고 서판에는 적지 말라하셨습니다. 제가 원컨대 듣고서 마음에 담아 행하고자 합니다. 위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아래로는 몸을 다스리며, 백성은 병이 없고 上下가 和親하고 德澤이 下層으로 흘러가고 자손에게 근심이 없도록 하여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합니다. 들을 수 있겠습니까?

(5-2) 기백: 심오한 질문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나를 다스리는 것, 이것을 다스리는 것과 저것을 다스리는 것, 작은 것을 다스리는 것과 큰 것을 다스리는 것, 國을 다스리는 것과 家를 다스리는 것에는 逆하면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順해야 합니다. 순해야 하는 것에는 陰陽脈과 氣의 逆順을 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백성⋅인민에 대해서도 모두 그들의 뜻을 따라주어야(順) 합니다.

(5-3) 황제: 어떻게 해야 순하는 것입니까? 기백: 國에 들어가서는 風俗을 묻고 家에 들어가서는 禁忌를 묻고 堂에 올라서는 禮를 물으며 환자에게 임해서는 편한 곳을 묻습니다2).(30)

(5-4) 황제의 질문: 天이 덮고 地가 싣고 萬物이 모두 갖추어지나 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天地의 氣로 생겨나고 四時의 法으로 이루어지고 군왕과 백성들이 모두 몸을 온전히 하고 싶어합니다. 몸의 질병의 실정을 모르고 淫邪가 날로 깊어져 골수에 붙고 마음은 사사로이 몸을 허하게 만듭니다. 제가 침으로 질병을 고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3)?(31)

(5-5) 황제: 제가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그 때문에 혼란스러움이 더욱 심해집니다. 백성들의 병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만 백성들은 듣고서 잔인한 도적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3)?(32)

(5-6) 황제가 岐伯에게 질문: 저는 萬民을 아들로 생각하고 백성을 기르고 租稅를 거둡니다. 저는 그들이 자급하지 못 하고 질병이 생기는 것이 슬픕니다. 저는 그들이 독약을 먹지 않고 砭石이 필요하지 않게 해주고 싶고, 微鍼만을 써서 경맥을 소통시키고 혈기를 조화롭게 하고 [경맥과 기혈의] 逆順出入하는 會를 운영해주고 싶습니다2).(33)

(5-1)∼(5-3)의 내용만 보면 이것이 과연 전문적인 의학서적의 일부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여기서 황제는 국가의 영원한 지속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社會統合⋅福祉의 落水效果와 함께 평민의 保健을 동등하게 고려하고 있다(5-1). 또한 國家統治와 家庭運營⋅自己運營을 연속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동일한 행위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5-2⋅5-3). 군주는 당시에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명보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며(5-4) 나아가 피통치자들 모두를 자식으로 생각하고 평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생각한다(5-5⋅5-6). 자비로운 황제는 심지어 자신이 직접 그들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으며(5-4) 약물과 폄석과 같은 강하거나 위험한 방법 대신 안전한 微鍼으로 치료해주고자 한다(5-6).

黃帝의 신하들은 모두 역사적 실존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의학의 전문가로서 묘사되고 있다. 黃帝가 묻고, 신하들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내경』의 서사에서 신하들이 주체적인 화자임을 나타낸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黃帝는 가산제 제국의 통치자를 상징하는 허구의 인물이다. 춘추전국시대의 국가에서 天子나 諸侯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던 계층은 몰락한 하급귀족이나 평민신분에서 유래한 士 집단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특권 신분집단에게 제공하고 그들의 정책조언자가 됨으로서 사회적 명예를 얻고 신분상승과 함께 많은 물질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한 편, 고대의 의료행위자들은 전통적으로 사회적 신분은 아주 낮았다. 한대에도 醫는 巫⋅商賈⋅百工과 더불어 평민 보다 하위 신분으로 생각되었다. 또한 의료행위는 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 淳于意의 스승이었고 부유한 계급인 陽慶은 자신이 의술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었던 華陀 역시 의술을 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24). 따라서 『내경』의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의료인이 황제에게 조언자 역할을 하는 장면은 현실에서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조언자로서의 역할은 『내경』 저작자들의 희망사항에 가깝다. 『내경』의 저작자들은 춘추전국 시기 士 집단처럼 자신들의 고급 지식과 기술을 군주나 귀족에게 제공함으로서 신분상승하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가 기백 등 신하들에게 보이는 대단히 예의바른 태도 역시 사회적 현실과 괴리되는 장면들이다. 『내경』에서 묘사되는 황제가 신하에게 절을 하는 행위는 『내경』이 허구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황제의 태도는 황제에게 존중 받고 싶어하는 『내경』 저작자들의 소망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의학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혹은 의학을 존중하라는 간접적인 의견표출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이야말로 의학의 진정한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경』의 저작자들이 지방 왕국의 통치자 혹은 한 제국의 황제에게(34) 의학 또는 침술의 중요성을 호소하기 위해 채택한 것은 “公共醫療(public medicine)”의 이념이다. 가산제 국가가 표방하는 복지국가 이념에 의학이 부응할 수 있다. 의학이 대중의 질병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君主像의 구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의공들은 대중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九鍼 특히 微鍼이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6-1) 황제: … 구침은 작게 보면 안이 없고 크게 보면 바깥이 없으며 깊게는 아래가 없고 높게는 덮을 수가 없으니 恍惚이 無窮하고 넘침이 끝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에 [구침은] 天道⋅人事⋅四時의 변화에 합하지만 이것을 털과 섞어서 하나로 묶을 수 있겠습니까?

(6-2) 기백: 高明한 질문입니다. 鍼道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2).(35)

(6-3) 황제가 기백에게 질문: 저는 구침을 선생께 배워서 백성에게 사용합니다2).…(36)

(6-4) 황제: 저는 小鍼을 작은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선생께서는 위로는 하늘에 합하고 아래로는 땅에 합하고 가운데로는 사람에게 합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침의 의미를 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6-5) 기백: 하늘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침 보다 큰 것은 5종의 兵器뿐입니다. 5종의 병기는 죽음의 물건이고 삶의 도구가 아닙니다. …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오로지 침뿐입니다. 침과 5종의 병기 중에 무엇이 작겠습니까 2)?(37)

구침은 9종의 침이다. 구침은 『靈樞⋅九鍼論』에 기재된 대로라면 최소 1.6寸에서 최대 7寸의 길이를 가진 결코 크지 않은 도구이다. 『내경』의 저자들은 이 작은 도구에 무한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들의 생각에 침의 이러한 중요성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침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고 전우주의 질서에 부합하는 신비롭고 위대한 것이다(6-1)⋅(6-4). 뿐만 아니라 침은 국가의 통치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6-2). 통치의 측면에서 침과 대등한 중요성을 가진 도구는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뿐이다. 그러나 무기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므로 대중의 생명에 유익한 도구 중에서 침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6-5). 이 때문에 국가의 통치자는 구침에 대해 알아야 하고 이것을 대중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6-3).

이러한 맥락에서 『내경』의 저자들은 구침이 대중 복지를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경』의 저자들은 의료기술이 단순히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치료의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들은 의료기술이 국가적 차원에서 광범위한 복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중국 최초의 인물들이다. 『내경』이 전문적인 의학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의학의 정치적 중요성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학에 관심이 있는 지식인 통치 집단을 독자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내경』의 저작자들은 가산제 통치자가 주도하는 公共福祉政策에 醫療擔當者로서 채택되어 참여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내경』의 저자들은 당시 일반 의료인들처럼 신분이 낮다는 상황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관료로서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여 대중의 복지와 건강에 기여하고 싶어 하였고 그러한 행동들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과 계급 역시 상승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견 의학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이 보이는 이러한 정치적 함의를 담은 수사와 내용들이 『내경』에 기재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

이상의 검토를 통해 『내경』의 (최소한 일부) 저자들의 계급과 신분은 100∼400석급 지방직 의료관리들인 의공 혹은 의공장이며 무⋅방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 의료인들과도 다른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들은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된 후 시작된 관제개혁 이후 『내경』을 편찬했을 것이다. 전한 중기는 한 제국의 가산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던 시기였다. 관료였던 의공(장)들은 제국 혹은 왕국의 공공복지정책에 의료담당자로 참여해서 지식인 특권신분 집단 및 대중의 복지와 건강에 기여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신분과 계급이 상승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이 『내경』을 이해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경』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사료 분석과 개념 변천 과정을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내경』이 전제하고 있는 사상적 배경이나 주요 학설들, 그리고 임상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해 많은 해명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접근들은 모두 의학을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간주하고 의학의 역사를 추상적인 학설과 관념의 역사로 보는 것들이다. 물론 의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나 분야에는 고유한 세계관과 언어적 프레임워크(linguistic framework), 내재적 합리성 및 정당화 방식이 있고 그 자체의 노선을 따라 변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합리성 혹은 다양한 정도의 비합리성, 여러 가능한 대안적인 정당화 방식들, 그리고 당시 경쟁하고 있는 세계관들과 여러 가지 개념들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것인지 혹은 부분적으로 수정할 것인지 절충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엄연히 그 분야를 수행하는 현실 속의 행위자이다. 의료행위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개인이나 집단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느끼고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어떤 이념적 전통 혹은 세계관 위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주위에서 유사한 행위를 하는 개인이나 집단들과 서로 경쟁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또한 그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과 소속집단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염두에 두기도 하며 신분질서 안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국가가 부과하고 강제하는 제도나 법률과 전통적인 관습에도 신경 써야 하고, 상대하는 각종 계급과 신분의 환자들과도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당하다고 믿는 지배질서 안에서 생활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의료행위에 영향을 주며 의료행위자들도 사회 안에서 다른 구성원과 집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내경』을 지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질서와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앎으로써 『내경』의 많은 측면들, 예컨대 『내경』 텍스트의 敍事 스타일, 『내경』 傳承儀禮의 성격, 다른 문헌들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유, 『내경』의 초현세적이면서도 현세내적인 양가적 태도와 자연순응적 태도의 기원, 『내경』이 성취한 합리성과 그 한계 등 知識社會學的 探究가 필요한 주제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내경』이란 책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그것을 쓴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과 복잡다단한 결정과정에 달려 있는지 알면 알수록 의학의 형성이 그렇게 필연적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우연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주도하는 집단의 선택⋅결정⋅희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Footnotes
(1) 따라서 후대의 王冰이 추가한 七篇大論은 본 논문의 주된 검토대상이 아니다.
(2) “先巫者, 因知百病之勝, 先知其病之所從生者, 可祝而已也.” 『靈樞·賊 風』. 이하 『靈樞』 인용은 모두 다음을 참조. 河北醫學院 校釋. 靈樞經校釋 (第2版).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2009.
(3) “歧伯對曰, 往古人居禽獸之閒, 動作以避寒, 陰居以避暑, 內無眷慕之 累, 外無伸官之形, 此恬憺之世, 邪不能深入也. 故毒藥不能治其內, 鍼石不 能治其外, 故可移精祝由而已.” 『素門⋅移精變氣論』. 이하 『素問』 인용은 모두 다음을 참조. 山東中醫學院, 河北醫學院 校釋. 黃帝內經素問校釋(第2 版).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2009.
(4) “歧伯曰, 色脈者, 上帝之所貴也, 先師之所傳也.” 『素門⋅移精變氣論』.
(5) (1) “黃帝問曰, 余聞方士, 或以腦髓為藏, 或以腸胃為藏, 或以為府, 敢 問更相反皆自謂是. 不知其道, 願聞其說.” 『素問⋅五藏別論』. 이하 『내경』 원문의 모든 번역은 저자.
(6) (2-1) “經言盛者寫之, 虛者補之, 余錫以方士, 而方士用之尚未能十全.” 『素問⋅至眞要大論』.
(7) (2-2) “帝曰: 論言治寒以熱,治熱以寒,而方士不能廢繩墨而更其道也。” 有病熱者,寒之而熱,有病寒者,熱之而寒,二者皆在新病復起,柰何治。” 『素問⋅至眞要大論』.
(8) 의료행위자를 의미하는 “醫”가 등장하는 편은 다음과 같다. 『素問』 「生氣通天論」, 「異法方宜論」, 「平人氣象論」, 「著至敎論」, 「疏五過論」.
(9) 이 숫자는 판본이나 주석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기재 편명은 다음 과 같다. 『素問』 「六節藏象論」, 「移精變氣論」, 「湯液醪醴論」, 「寶命全形論」, 「八正神明論」, 「離合真邪」, 「瘧論」, 「鍼解」, 「至真要大論」, 「示從容論」, 「徵四失論」, 「解精微論」; 『靈樞』 「九鍼十二原」, 「小鍼解」, 「邪氣藏府 病形」, 「根結」, 「終始」, 「經別」, 「脹論」, 「逆順肥瘦」, 「順氣一日分為四時」, 「禁服」, 「五色」, 「逆順」, 「衛氣失常」, 「玉版」, 「行鍼」, 「官能」, 「歲露論」.
(10) “(3-1) 歧伯曰, 法往古者, 先知鍼經也. 驗於來今者, 先知日之寒溫, 月 之虛盛, 以候氣之浮沈, 而調之於身, 觀其立有驗也. (3-2) 觀其冥冥者, 言形 氣榮衛之不形於外, 而工獨知之, 以日之寒溫, 月之虛盛, 四時氣之浮沈, 參 伍相合而調之, 工常先見之, 然而不形於外, 故曰觀於冥冥焉. (3-3) 通於無 窮者, 可以傳於後世也, 是故工之所以異也. (3-4) 然而不形見於外, 故俱不 能見也. 視之無形, 嘗之無味, 故謂冥冥, 若神髣. (3-5) 虛邪者, 八正之虛 邪氣也. 正邪者, 身形若用力, 汗出, 腠理開, 逢虛風, 其中人也微, 故莫知其 情, 莫見其形. 上工救其萌牙, 必先見三部九候之氣, 盡調不敗而救之, 故曰 上工. 下工救其已成, 救其已敗.” 『素問·八正神明論』.
(11) “凡此數事, 皆五藏蹙中之時暴作也. 良工取之, 拙者疑殆.” 『史記⋅ 扁鵲倉公列傳』. 이하 『史記』의 인용은 모두 다음을 참조. 司馬遷. 史記. 주소: http://ctext.org/shiji/zh(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12) “如淳云, 非醫⋅巫⋅商賈⋅百工也.” 『史記⋅李將軍列傳』 顔師古注의 如淳注 인용.
(13) “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天下之通 義也.” 『孟子⋅滕文公上』. 孟子. 孟子. 주소: http://ctext.org/mengzi/zh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14) “醫善吮人之傷, 含人之血, 非骨肉之親也, 利所加也.” 『韓非子⋅備內』. 韓 非子. 韓非子. 주소: http://ctext.org/hanfeizi/zh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15) “醫⋅方⋅諸食技術之人, 焦神極能, 爲重稰也”. 『史記⋅貨殖列傳』.
(16)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淸의 徐大春이 의를 “小道”·“賤工”으로 평가 하는 것처럼 전근대시기를 통틀어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醫, 小道也, 精義也, 重任也,賤工也.“. 徐大春. 『醫學源流論』. 徐大春. 『徐靈胎醫書全 集』. 太原. 山西科學技術出版社. 1999.
(17) “貴之敖賤, 此天下之害也.” 『墨子·兼愛下』. 墨子. 墨子. 주소: http://ctext.org/mohism/zh(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18) “貴之傲賤, 此天之所不欲也.” 『墨子·天志中』. 墨子. 墨子. 주소: http://ctext.org/mohism/zh(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19) 이 밖에 일정 등급 이하의 관직을 합법적으로 구매하는 방법이 있었다.
(20) “(燕王) 旦得書, 以符璽屬醫工長.” 『漢書·武五子列傳』. 班固. 漢書. 주소: http://ctext.org/han-shu/zh(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21) “諸王當歸國, 詔書選三署郎補王家長吏, 除倫為淮陽王醫工長.” 『東觀 漢記·第五倫傳』. 劉珍 等. 東觀漢記. 주소: http://ctext.org/dongguanhan-ji/zh(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22) “建武二十七年, 舉孝廉, 補淮陽國醫工長, 隨王之國.” 『後漢書·第五 鍾離宋寒列傳』. 范曄. 後漢書. 주소: http://ctext.org/hou-han-shu/zh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23) 여러 학자들이 전한시기 중앙의 의료직이 太常과 少府로 이원화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본고에서는 加藤繁의 설이 옳다고 판단하고 여기에 따른다. 加藤繁 著. 吳杰 譯. 中國經濟史考證 第1卷. 北京. 商務印書館. 1962:83.
(24) 『내경』에 등장하는 “工”이 모두 의공을 지칭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 다. 이 단어가 의료행위를 하는 기능인을 광범위하게 지칭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경』에 나오는 “上工”, “中 工”, “下工”, “良工”, “粗工” 등의 “工”은 관직명 보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金仕起. 古代醫者的角色-兼論其身份與角色. 李建民 主編. 生命與醫療. 北京.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2005.; 耿鑑庭. 從西漢醫工銅盆 的發現來探索“醫工”這一名辭的變化使用. 新中醫. 1973(03).; 張顯成. 先 秦兩漢醫學用語匯釋. 成都. 巴蜀書社. 2002.
(25) (4-1) “黃帝坐明堂, 召雷公而問之曰, 子知醫之道乎? 雷公對曰, 誦而 頗能解, 解而未能別, 別而未能明, 明而未能彰, 足以治群僚, 不足至侯王.” 『素問⋅著至教論』.
(26) (4-2) “診有三常, 必問貴賤, 封君敗傷, 及欲侯王.” 『素問⋅疏五過論』. 이 밖에 運氣七篇 중의 하나인 「氣交變大論」에 “侯王”이 1회 나온다.
(27) 가산제 이념형의 다른 조건들은 통치자의 군사권과 재판권의 무제한 적인 행사, 피지배자에 대한 징집권, 통치자의 경제적 독점주의 등이다. 가산관료제가 근대 관료제와 구분되는 차이점 중의 하나는 통치자에 대한 인격적인 복종관계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Weber M(auth.), Roth G, Wittich C(ed.). Economy and Society: An Outline of Interpretive Sociology(2 vol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and Los Angeles. 2013 : 1013-30.
(28) 이 밖에 한대의 지방직 관리들은 일반적으로 중앙직 관리가 되는 것을 선망했다는 증거가 있다. 張鶴耀. 簡論 “七國之亂” 後西漢諸侯國官 制演變的特徵. 齊鲁學刊. 2015(1).
(29) Weber M(auth.), Roth G, Wittich C(ed.). Economy and Society: An Outline of Interpretive Sociology(2 vol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and Los Angeles. 2013 : 1106-07. 베버는 중국의 가산 제적 복지국가 이념의 기원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 백성의 평안에 책임을 가지는 카리스마적 지배자의 관심, 둘째, 사회철학적 관심 을 가진 문사계층이 발전시킨 공리주의적 사회윤리, 셋째, 봉록을 받는 관료들의 이념. 막스 베버 저. 홍윤기 역. 힌두교와 불교(종교사회학I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 187.
(30) (5-1) “黃帝曰, 余聞先師, 有所心藏, 弗著於方, 余願聞而藏之, 則而行 之, 上以治民, 下以治身, 使百姓無病, 上下和親, 德澤下流, 子孫無優, 傳於 後世, 無有終時, 可得聞乎? (5-2) 歧伯曰, 遠乎哉問也. 夫治民與自治, 治彼 與治此, 治小與治大, 治國與治家, 未有逆而能治之也, 夫惟順而已矣. 順者, 非獨陰陽脈論氣之逆順也, 百姓人民皆欲順其志也. (5-3) 黃帝曰, 順之奈何? 歧伯曰, 入國問俗, 入家問諱, 上堂問禮, 臨病人問所便.” 『靈樞⋅師傳』.
(31) (5-4) “黃帝問曰, 天覆地載, 萬物悉備, 莫貴於人, 人以天地之氣生, 四 時之法成, 君王眾庶, 盡欲全形, 形之疾病, 莫知其情, 留淫日深, 著於骨髓, 心私慮之. 余欲鍼除其疾病, 為之奈何.” 『素問⋅寶命全形論』.
(32) (5-5) “帝曰, 余念其痛, 心為之亂惑反甚. 其病不可更代, 百姓聞之, 以為殘賊, 為之柰何?” 『素問⋅寶命全形論』.
(33) (5-6) “黃帝問於歧伯曰, 余子萬民, 養百姓而收其租稅. 余哀其不給而 屬有疾病. 余欲勿使被毒藥, 無用砭石, 欲以微鍼通其經脈, 調其血氣, 榮其 逆順出入之會.” 『靈樞⋅九鍼十二原』.
(34) 유사한 사례를 漢 文帝에게 답하는 淳于意의 예에서 발견할 수 있다.
(35) “(6-1) 夫九鍼者, 小之則無內, 大之則無外, 深不可為下, 高不可為蓋, 恍惚無竅, 流溢無極, 佘知其合於天道人事四時之變也, 然余願雜之毫毛, 渾 束為一, 可乎? (6-2) 歧伯曰, 明乎哉問也, 非獨鍼道焉, 夫治國亦然.” 『靈 樞⋅外揣』.
(36) (6-3) “黃帝問于歧伯曰, 余聞九鍼於夫子, 而行之於百姓.” 『靈樞⋅行鍼』.
(37) “(6-4) 黃帝曰, 余以小鍼為細物也, 夫子乃言上合之于天, 下合之于地, 中合之于人, 余以為過鍼之意矣, 願聞其故. (6-5) 歧伯曰, 何物大于天乎? 夫大于鍼者, 惟五兵者焉, 五兵者死之備也, 非生之具. 且夫人者, 天地之鎮 也, 其不可不參乎? 夫治民者, 亦唯鍼焉. 夫鍼之與五兵, 其孰小乎?” 『靈樞⋅ 玉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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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17, 3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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